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행성의 운동 법칙
과학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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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5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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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1년 12월 27일 ~ 1630년 11월 15일
독일
천문학자
오스트리아 린츠대학교, 그라츠대학교 교수
독일 튀빙겐대학교 교수
《신(新)천문학》에서 행성의 운동에 관한 제1법칙인 '타원궤도의 법칙'과
제2법칙인 '면적속도 일정의 법칙'을 발표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수정·발전시켰다.
그뒤《우주의 조화》에 행성운동의 제3법칙을 발표하였다.
[행성의 운동 법칙]은 케플러가 관찰하고, 뉴턴이 이론으로 증명한 행성의 운동 법칙이다.
독일 바일 출생.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4세 때에 천연두를 앓는 등 육체적인 병약함과 경제적인 빈곤 속에서 자랐다.
17세에 아버지가 전상으로 죽자, 이듬해 튀빙겐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1591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신학에 싫증을 느끼고, M.메스트린 교수로부터 소개받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地動說)에 감동되어 천문학으로 전향하였다.
1594년 그라츠대학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강의하는 한편, 점성력(占星曆)의 편수(編修)를 위촉받아 일하면서,
그 해 겨울의 강추위와 전쟁을 예고한 것이 적중하여 좋은 평판을 받았다.
1595년 천체력(天體曆)을 발간하고, 이듬해 《우주구조의 신비》를 출판하여 행성의 수와 크기,
배열간격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이로 인하여 T.브라헤와 G.갈릴레이를 알게 되었다.
당시는 신교와 구교의 싸움이 격렬하였으므로 신교신자인 케플러는 구교파로부터 심한 배척을 받았다.
그 후 1600년 그라츠대학을 떠나 프라하로 옮겨 브라헤의 제자가 되었다.
이곳에서 루돌프 2세의 보호를 받으며, 화성(火星)의 운행을 관측하였고,
브라헤가 16년간에 걸쳐 연구한 화성 자료를 브라헤의 임종시 인계받았다.
1601년 브라헤의 후임으로 궁정의 수학자가 되었다.
그 후 행성들의 합(合)을 연구하던 중에 뱀주인자리에서 초신성(超新星:케플러신성)을 발견하였다(1604).
1609년 화성관측 결과를 《신(新)천문학》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여기서 행성의 운동에 관한 제1법칙인 ‘타원궤도의 법칙’과 제2법칙인 ‘면적속도(面積速度) 일정의 법칙’을 발표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수정 ·발전시켰다. 또한 운동의 기인(起因)으로서 태양의 자전에 따른 자기적(磁氣的) 추진력을 제안하였다.
1611년에는 천연두로 아내와 한 아들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굴절광학 Dioptrice》을 저술하여 케플러식 망원경의 원리를 설명하였다.
1612년 루돌프 2세가 죽어 더이상 궁전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자, 린츠대학의 수학교수 겸 측량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1619년 《우주의 조화 De Harmonices Mundi》를 출판하여, 행성의 공전주기와 공전궤도의 반지름과의 관계를 설명한
행성운동의 제3법칙을 발표하였다.
1626년 종교전쟁을 피하여 울름으로 이전하였고, 다음해에 로그를 사용하여 행성의 위치를 계산한 《루돌프표(表) Tabulae Rudolphinae》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당시의 원양항해자들로부터 큰 신뢰를 얻었다.
1627년 출간된 [루돌프 표]는 최초의 근대적인 천문표로 이를 이용하여 과거, 미래의 어느 때건 그 시점의 행성 위치를 계산 할 수 있게 되었다.
1630년 11월 15일 길에서 급사하였다.
독일
천문학자
오스트리아 린츠대학교, 그라츠대학교 교수
독일 튀빙겐대학교 교수
《신(新)천문학》에서 행성의 운동에 관한 제1법칙인 '타원궤도의 법칙'과
제2법칙인 '면적속도 일정의 법칙'을 발표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수정·발전시켰다.
그뒤《우주의 조화》에 행성운동의 제3법칙을 발표하였다.
[행성의 운동 법칙]은 케플러가 관찰하고, 뉴턴이 이론으로 증명한 행성의 운동 법칙이다.
독일 바일 출생.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4세 때에 천연두를 앓는 등 육체적인 병약함과 경제적인 빈곤 속에서 자랐다.
17세에 아버지가 전상으로 죽자, 이듬해 튀빙겐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1591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신학에 싫증을 느끼고, M.메스트린 교수로부터 소개받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地動說)에 감동되어 천문학으로 전향하였다.
1594년 그라츠대학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강의하는 한편, 점성력(占星曆)의 편수(編修)를 위촉받아 일하면서,
그 해 겨울의 강추위와 전쟁을 예고한 것이 적중하여 좋은 평판을 받았다.
1595년 천체력(天體曆)을 발간하고, 이듬해 《우주구조의 신비》를 출판하여 행성의 수와 크기,
배열간격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이로 인하여 T.브라헤와 G.갈릴레이를 알게 되었다.
당시는 신교와 구교의 싸움이 격렬하였으므로 신교신자인 케플러는 구교파로부터 심한 배척을 받았다.
그 후 1600년 그라츠대학을 떠나 프라하로 옮겨 브라헤의 제자가 되었다.
이곳에서 루돌프 2세의 보호를 받으며, 화성(火星)의 운행을 관측하였고,
브라헤가 16년간에 걸쳐 연구한 화성 자료를 브라헤의 임종시 인계받았다.
1601년 브라헤의 후임으로 궁정의 수학자가 되었다.
그 후 행성들의 합(合)을 연구하던 중에 뱀주인자리에서 초신성(超新星:케플러신성)을 발견하였다(1604).
1609년 화성관측 결과를 《신(新)천문학》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여기서 행성의 운동에 관한 제1법칙인 ‘타원궤도의 법칙’과 제2법칙인 ‘면적속도(面積速度) 일정의 법칙’을 발표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수정 ·발전시켰다. 또한 운동의 기인(起因)으로서 태양의 자전에 따른 자기적(磁氣的) 추진력을 제안하였다.
1611년에는 천연두로 아내와 한 아들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굴절광학 Dioptrice》을 저술하여 케플러식 망원경의 원리를 설명하였다.
1612년 루돌프 2세가 죽어 더이상 궁전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자, 린츠대학의 수학교수 겸 측량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1619년 《우주의 조화 De Harmonices Mundi》를 출판하여, 행성의 공전주기와 공전궤도의 반지름과의 관계를 설명한
행성운동의 제3법칙을 발표하였다.
1626년 종교전쟁을 피하여 울름으로 이전하였고, 다음해에 로그를 사용하여 행성의 위치를 계산한 《루돌프표(表) Tabulae Rudolphinae》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당시의 원양항해자들로부터 큰 신뢰를 얻었다.
1627년 출간된 [루돌프 표]는 최초의 근대적인 천문표로 이를 이용하여 과거, 미래의 어느 때건 그 시점의 행성 위치를 계산 할 수 있게 되었다.
1630년 11월 15일 길에서 급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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