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Socrates, Sōkratēs ]
과학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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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8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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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470년 ~ BC 399년
그리스 아테네
철학자
기원전 5세기경 활동한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문답법을 통한 깨달음, 무지에 대한 자각, 덕과 앎의 일치를 중시하였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Plato),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와 함께 고대 그리스 철학의 전성기를 이룩한 인물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이다. 아테네에 살면서 많은 제자들을 교육시켰는데, 플라톤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 활동은 아테네 법에 위배된다 하여 사형을 당했다. 당시 아테네에서는 민주주의제도가 쇠퇴하면서, 사회적 황폐가 확대되는 상황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그 당시의 지배계급인 귀족계급을 대변하고 있었는데, 새로운 신흥계급의 출현으로 반민주주의적인 귀족계급이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종래의 그리스의 유물론적인 자연철학에 대립하여 그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기초로 하여 '영혼'에 대해 깊게 생각하면서 삶의 온당한 방법을 아는 것을 지식의 목적이라 하고 이로써 도덕적 행위를 고양시키는 것을 지향하였다.
소크라테스의 생애를 추정할 수 있는 초창기 자료는 대부분 제자인 플라톤과 크세노폰에게서 나왔다. 플라톤의 대화편 《테아이테토스(Theaetetos)》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69년경 아테네에서 조각가인 아버지 소프로니코스와 산파인 어머니 파이나레테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남을 가르치는 일 즉, 철학적 토론에 매진했는데, 남루한 옷차림으로 광장을 거니는 그에게 다양한 계층의 제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또한 강의를 통해 세속적인 명예와 부를 누렸던 소피스트(Sophist)와는 달리 소크라테스는 가르침의 대가로 돈을 받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왜소한 체격과 투박한 외모를 가졌으나 체력이 좋고 참을성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느긋한 성격이었으며 사색에 잠기는 일이 많고, 부(富)에 연연하지않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누가 봐도 추남이라고 부를 만했지만, 신체만은 건강한 편이어서 추위나 더위에도 대단한 인내력을 발휘했고, 밤새워 술을 마시고도 끄떡없었다고 한다. 그가 전쟁에 참가했을 때, 혹독한 겨울날씨에도 그는 맨발로 얼음 위를 걸어갔다고 한다. 한여름철에는 이른 아침부터 꼬박 밤을 새우기까지 연병장 한가운데에 서서 깊은 사색을 했고, 해가 떠오르자 태양을 향해 기도를 드린 후에 비로소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그는 세 번이나 전쟁에 참가하여 용맹을 떨쳤으며, 모든 동료가 도망칠 때에도 장군과 함께 아군과 적군을 돌아보며 태연하게 걸어갔다고 한다.
그의 철학사상의 특징과 의의는 일반적으로 다음 네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두었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토론하는 것을 즐겼는데 일반적인 교사들이 제자들이 던진 질문에 답을 주고자 했던 것과는 달리 거꾸로 질문을 던졌다. 그는 정의가 무엇인지, 경건하고 불경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신중함과 무모함이 어떻게 다른지, 우정을 어떻게 볼 것인지 등에 관해 상대방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과정을 통해 계속해서 답을 찾아 나가도록 유도하였다. 질의응답을 통한 지식의 추구라는 변증법 방식은 소크라테스 이전 시기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발전시켰다.
둘째, 스스로의 무지를 자각하고자 했다.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는 고대 격언은 소크라테스를 통해 더욱 유명해졌다. 델포이 신탁은 소크라테스를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선언하였으나 그는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고 다녔다. 이와 같은 인간 스스로의 무지에 대한 자각과 문답법을 이용한 내면적 탐구는 고대의 철학적 관점이 자연에서 인간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셋째,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윤리적인 측면이 강했다. 실제 생활에서도 절제를 추구하였던 그는 ‘선’을 중시하여 토론 과정에서도 관련된 질문을 많이 던졌다. 또한 그는 옳은 것을 알았을 때 비로소 바르게 행하게 된다고 생각하여 덕과 앎을 동일시하였다. 최선의 선을 추구하기 위해 사람들은 참된 덕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삶의 추구는 스토아학파의 선구적인 모습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넷째,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정치적으로 해석될 여지를 갖고 있었다. 특히 ‘현인(賢人)에 의한 통치’, ‘화려한 연설에 대한 비난’, ‘스스로의 무지에 대한 자각’, ‘덕과 앎의 일치’는 아테네의 민주주의 정부에 대한 위협으로 비춰졌다. 이후 플라톤은 이러한 사상을 발전시켜 이상적인 철인정치(哲人政治)를 보다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한편 일부 연구자들은 아름다움, 선과 같은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것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는데서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이데아'에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으나, 두 사상의 개연성에 비약적 측면이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
참조 : [네이버 지식백과] 소크라테스 [Socrates] (두산백과)
그리스 아테네
철학자
기원전 5세기경 활동한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문답법을 통한 깨달음, 무지에 대한 자각, 덕과 앎의 일치를 중시하였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Plato),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와 함께 고대 그리스 철학의 전성기를 이룩한 인물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이다. 아테네에 살면서 많은 제자들을 교육시켰는데, 플라톤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 활동은 아테네 법에 위배된다 하여 사형을 당했다. 당시 아테네에서는 민주주의제도가 쇠퇴하면서, 사회적 황폐가 확대되는 상황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그 당시의 지배계급인 귀족계급을 대변하고 있었는데, 새로운 신흥계급의 출현으로 반민주주의적인 귀족계급이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종래의 그리스의 유물론적인 자연철학에 대립하여 그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기초로 하여 '영혼'에 대해 깊게 생각하면서 삶의 온당한 방법을 아는 것을 지식의 목적이라 하고 이로써 도덕적 행위를 고양시키는 것을 지향하였다.
소크라테스의 생애를 추정할 수 있는 초창기 자료는 대부분 제자인 플라톤과 크세노폰에게서 나왔다. 플라톤의 대화편 《테아이테토스(Theaetetos)》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69년경 아테네에서 조각가인 아버지 소프로니코스와 산파인 어머니 파이나레테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남을 가르치는 일 즉, 철학적 토론에 매진했는데, 남루한 옷차림으로 광장을 거니는 그에게 다양한 계층의 제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또한 강의를 통해 세속적인 명예와 부를 누렸던 소피스트(Sophist)와는 달리 소크라테스는 가르침의 대가로 돈을 받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왜소한 체격과 투박한 외모를 가졌으나 체력이 좋고 참을성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느긋한 성격이었으며 사색에 잠기는 일이 많고, 부(富)에 연연하지않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누가 봐도 추남이라고 부를 만했지만, 신체만은 건강한 편이어서 추위나 더위에도 대단한 인내력을 발휘했고, 밤새워 술을 마시고도 끄떡없었다고 한다. 그가 전쟁에 참가했을 때, 혹독한 겨울날씨에도 그는 맨발로 얼음 위를 걸어갔다고 한다. 한여름철에는 이른 아침부터 꼬박 밤을 새우기까지 연병장 한가운데에 서서 깊은 사색을 했고, 해가 떠오르자 태양을 향해 기도를 드린 후에 비로소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그는 세 번이나 전쟁에 참가하여 용맹을 떨쳤으며, 모든 동료가 도망칠 때에도 장군과 함께 아군과 적군을 돌아보며 태연하게 걸어갔다고 한다.
그의 철학사상의 특징과 의의는 일반적으로 다음 네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두었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토론하는 것을 즐겼는데 일반적인 교사들이 제자들이 던진 질문에 답을 주고자 했던 것과는 달리 거꾸로 질문을 던졌다. 그는 정의가 무엇인지, 경건하고 불경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신중함과 무모함이 어떻게 다른지, 우정을 어떻게 볼 것인지 등에 관해 상대방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과정을 통해 계속해서 답을 찾아 나가도록 유도하였다. 질의응답을 통한 지식의 추구라는 변증법 방식은 소크라테스 이전 시기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발전시켰다.
둘째, 스스로의 무지를 자각하고자 했다.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는 고대 격언은 소크라테스를 통해 더욱 유명해졌다. 델포이 신탁은 소크라테스를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선언하였으나 그는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고 다녔다. 이와 같은 인간 스스로의 무지에 대한 자각과 문답법을 이용한 내면적 탐구는 고대의 철학적 관점이 자연에서 인간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셋째,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윤리적인 측면이 강했다. 실제 생활에서도 절제를 추구하였던 그는 ‘선’을 중시하여 토론 과정에서도 관련된 질문을 많이 던졌다. 또한 그는 옳은 것을 알았을 때 비로소 바르게 행하게 된다고 생각하여 덕과 앎을 동일시하였다. 최선의 선을 추구하기 위해 사람들은 참된 덕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삶의 추구는 스토아학파의 선구적인 모습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넷째,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정치적으로 해석될 여지를 갖고 있었다. 특히 ‘현인(賢人)에 의한 통치’, ‘화려한 연설에 대한 비난’, ‘스스로의 무지에 대한 자각’, ‘덕과 앎의 일치’는 아테네의 민주주의 정부에 대한 위협으로 비춰졌다. 이후 플라톤은 이러한 사상을 발전시켜 이상적인 철인정치(哲人政治)를 보다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한편 일부 연구자들은 아름다움, 선과 같은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것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는데서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이데아'에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으나, 두 사상의 개연성에 비약적 측면이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
참조 : [네이버 지식백과] 소크라테스 [Socrates]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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