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크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무의식
과학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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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2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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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 5. 6. - 1939. 9. 23.
오스트리아
의사,심리학자, 정신분석학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모라비아의 작은 도시 프라이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유대계 사업가인 그의 아버지는 40세 때 20세의 여성과 재혼해 7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중 맏이가 바로 ‘지기’였다. 얼마 후 프로이트 일가는 빈으로 이주했으며, 당시 다섯 살이었던 ‘지기’는 훗날 나치의 탄압으로 망명을 떠날 때까지 무려 70년 넘게 이 도시에 살았다.
1873년, 빈 의과대학에 입학한 지기스문트(Sigismund)는 이때부터 이름을 지그문트(Sigmund)로 바꾼다.
생리학을 전공한 프로이트는 어류와 갑각류 등의 신경계 구조를 연구해 1881년에 학위를 받았다.
1882년에 그는 훗날 아내가 되는 마르타 베르나이스를 만나 약혼하고, 안정된 생활을 위해 연구직을 포기하고 빈 종합병원에 들어가 몇 년 동안 일한다. 최대한 빨리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낀 프로이트는 그 당시 각광받던 새로운 마취제 코카인의 효력을 연구하는 일에 뛰어드는데, 이때 코카인의 중독성을 과소평가한 것은 그의 일생일대 실책으로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1885년, 프로이트는 장학금을 받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고, 5개월 동안 저명한 의사 장 마르탱 샤르코(1825-1893)의 강의를 듣는다. 샤르코는 여성의 히스테리를 비롯한 발작증 치료에서 최면술을 이용해 큰 효과를 보았다. 프로이트는 샤르코의 치료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이후 반세기 동안 자신의 화두가 될 인간의 심신 관계에 관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파고든다.
1886년에 빈으로 돌아온 프로이트는 종합병원을 그만두고 신경질환 전문의로 개업하는 한편, 약혼 4년 만에 마르타와 결혼해서 첫 아이를 얻는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만약 프로이트가 결혼 때문에 병원을 개업하지 않았다면 정신분석학은 결코 탄생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역시 신경질환 전문의였던 요제프 브로이어(1842-1925)와의 만남은 프로이트의 연구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주었다. 브로이어는 훗날 임상보고서의 주인공으로 유명해진 안나 O.를 비롯한 여러 히스테리 환자를 치료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 문제에 중요한 힌트를 제공했다. 두 사람은 <히스테리 연구>(1895)라는 공저를 내놓았지만, 성(性)을 히스테리의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한 프로이트와 그렇지 않다고 본 브로이어 간에는 불화가 빚어진다. 브로이어와 결별한 프로이트는 이비인후과 의사인 빌헬름 플리스(1858-1928)의 도움으로 이른바 과학적 심리학의 이론을 구상한다. 그리고 1896년에 이르러 자신의 방법을 ‘정신분석’으로 명명한다.
그의 막내딸 안나 프로이트(1895-1982)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정신분석학자가 되었으며 특히 아동 심리학의 권위자가 되었다. 아버지의 말년에 간호와 비서 노릇을 도맡았으며, 아버지의 사후에 사실상의 유언집행인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때 그의 편이었으나 훗날 불화로 인해 등을 돌린 사람 중에서는 특히 알프레트 아들러(1870-1937)와 칼 융(1875-1961)이 유명하다. 아들러는 1911년에, 융은 1914년에 프로이트와 결별했으며 이후 각자의 독자적인 심리학 이론을 구축하며 일가를 이루었다. 두 사람 모두 프로이트가 성(性)을 지나치게 강조한 점을 불만스럽게 생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은 1933년에 프로이트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 세계 평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바 있다. 아인슈타인 역시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유대계였으며, 나치의 탄압을 피해 훗날 미국으로 망명했다. 나아가 두 사람 모두 무신론자와 평화주의자였다.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1939.9 나치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하고 83세를 일기로 사망하다 .
프로이트의 생애 무명의 생리학자에서 정신분석의 창시자로
프로이트의 사상: 무의식의 발견과 그 작동 방식에 관한 연구
프로이트에 대한 평가: 혁명적 이론인가 사이비 과학인가?
오스트리아
의사,심리학자, 정신분석학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모라비아의 작은 도시 프라이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유대계 사업가인 그의 아버지는 40세 때 20세의 여성과 재혼해 7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중 맏이가 바로 ‘지기’였다. 얼마 후 프로이트 일가는 빈으로 이주했으며, 당시 다섯 살이었던 ‘지기’는 훗날 나치의 탄압으로 망명을 떠날 때까지 무려 70년 넘게 이 도시에 살았다.
1873년, 빈 의과대학에 입학한 지기스문트(Sigismund)는 이때부터 이름을 지그문트(Sigmund)로 바꾼다.
생리학을 전공한 프로이트는 어류와 갑각류 등의 신경계 구조를 연구해 1881년에 학위를 받았다.
1882년에 그는 훗날 아내가 되는 마르타 베르나이스를 만나 약혼하고, 안정된 생활을 위해 연구직을 포기하고 빈 종합병원에 들어가 몇 년 동안 일한다. 최대한 빨리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낀 프로이트는 그 당시 각광받던 새로운 마취제 코카인의 효력을 연구하는 일에 뛰어드는데, 이때 코카인의 중독성을 과소평가한 것은 그의 일생일대 실책으로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1885년, 프로이트는 장학금을 받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고, 5개월 동안 저명한 의사 장 마르탱 샤르코(1825-1893)의 강의를 듣는다. 샤르코는 여성의 히스테리를 비롯한 발작증 치료에서 최면술을 이용해 큰 효과를 보았다. 프로이트는 샤르코의 치료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이후 반세기 동안 자신의 화두가 될 인간의 심신 관계에 관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파고든다.
1886년에 빈으로 돌아온 프로이트는 종합병원을 그만두고 신경질환 전문의로 개업하는 한편, 약혼 4년 만에 마르타와 결혼해서 첫 아이를 얻는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만약 프로이트가 결혼 때문에 병원을 개업하지 않았다면 정신분석학은 결코 탄생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역시 신경질환 전문의였던 요제프 브로이어(1842-1925)와의 만남은 프로이트의 연구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주었다. 브로이어는 훗날 임상보고서의 주인공으로 유명해진 안나 O.를 비롯한 여러 히스테리 환자를 치료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 문제에 중요한 힌트를 제공했다. 두 사람은 <히스테리 연구>(1895)라는 공저를 내놓았지만, 성(性)을 히스테리의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한 프로이트와 그렇지 않다고 본 브로이어 간에는 불화가 빚어진다. 브로이어와 결별한 프로이트는 이비인후과 의사인 빌헬름 플리스(1858-1928)의 도움으로 이른바 과학적 심리학의 이론을 구상한다. 그리고 1896년에 이르러 자신의 방법을 ‘정신분석’으로 명명한다.
그의 막내딸 안나 프로이트(1895-1982)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정신분석학자가 되었으며 특히 아동 심리학의 권위자가 되었다. 아버지의 말년에 간호와 비서 노릇을 도맡았으며, 아버지의 사후에 사실상의 유언집행인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때 그의 편이었으나 훗날 불화로 인해 등을 돌린 사람 중에서는 특히 알프레트 아들러(1870-1937)와 칼 융(1875-1961)이 유명하다. 아들러는 1911년에, 융은 1914년에 프로이트와 결별했으며 이후 각자의 독자적인 심리학 이론을 구축하며 일가를 이루었다. 두 사람 모두 프로이트가 성(性)을 지나치게 강조한 점을 불만스럽게 생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은 1933년에 프로이트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 세계 평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바 있다. 아인슈타인 역시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유대계였으며, 나치의 탄압을 피해 훗날 미국으로 망명했다. 나아가 두 사람 모두 무신론자와 평화주의자였다.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1939.9 나치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하고 83세를 일기로 사망하다 .
프로이트의 생애 무명의 생리학자에서 정신분석의 창시자로
프로이트의 사상: 무의식의 발견과 그 작동 방식에 관한 연구
프로이트에 대한 평가: 혁명적 이론인가 사이비 과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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