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로버트 다윈[Charles Robert Darwin] 종의 기원
과학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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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5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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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 2. 12. - 1882. 4. 19.
영국
박물학자
"인류 역사상 최고의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누굴까? 딱 한 사람만 골라야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그를 택하겠다." 철학자 대니얼 데닛은 그를 감히 뉴턴이나 아인슈타인보다 더 위대한 사상가라고 치켜세운다. 데닛은 다윈이 "자연선택이라는 과정을 도입해 의미와 목적이 없는 물질 영역과 의미, 목적, 그리고 설계가 있는 생명 영역을 통합시켰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에든버러 대학에서의 의학 공부를 채 2년도 못 채우고 낙향한 18세 청년을 그 누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아이디어를 낼 만한 인물이라고 기대했겠는가? 오히려 다윈은 "사냥질, 개, 쥐잡기에나 관심이 있는 너는 가족과 네 자신에게 부끄러운 존재가 될 거다"라는 아버지의 폭언을 눈물로 삼켜야 했다.
1827년 다윈은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꾸역꾸역 신학을 공부하러 간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어떻게 해야 영국을 떠나 생명이 우글대는 열대림을 탐험할 수 있을까?' 인류에게 '적응'이라는 화두를 처음으로 던진 다윈이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주변 환경에 적응하는 데 계속해서 실패해 온 셈이다. 하지만 환경도 언젠가는 변하는 법. 다윈은 우여곡절 끝에 비글 호에 승선하고 꿈에 그리던 남아메리카로 향한다.
만일 다윈이 비글 호를 타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5년 동안(1831~1836) 배멀미와 온갖 풍토병으로 고생할 일은 없었겠지만 '다윈'이라는 이름이 지금처럼 생존, 번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비글 호 탐험을 끝으로 다시는 영국 밖을 나가 보지 못했을 만큼 다윈에게 그것은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다. 길이가 26미터밖에 안 되는 비글 호의 좁은 선실에서 그는 자신의 우상 찰스 라이엘이 쓴 『지질학 원리』를 탐독했고 정박지에서는 열대림과 해안의 온갖 동식물을 관찰·채집했다.
수많은 학문 종의 원류, 다윈의 진화론
『종의 기원』은 인공 교배로 생긴 변이들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한다. 이 논의를 위해 다윈은 비둘기 교배 전문가들과 실제로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다윈은 인공 선택에 의해 새로운 품종이 나올 수 있다면 자연선택에 의해서 새로운 종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자연 변이들은 제한된 환경에서 다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생존 경쟁이 불가피하다. 자연선택은 바로 이 과정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조금이라도 생존에 유리한 형질이 살아남아 자손을 퍼뜨리는 과정이다. 물론 부모 형질이 자식에게 대물림되는 과정도 필요하다. 이 모든 문제를 다룬 후에 특이하게도 다윈은 예상 반론을 정리하고 그것을 조목조목 검토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종의 기원』은 매우 방어적인 책이며 다윈도 고백하듯 '하나의 긴 논증'이다.
생명이 진화한다는 주장 자체는 그 당시만 해도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장 밥티스트 라마르크도 있었고 심지어 다윈의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Erasmus Darwin, 1731~1802)도 비슷한 주장을 했었다. 『종의 기원』의 독창성은 그 진화가 자연선택에 의해서 진행되며 그 결과 생명이 마치 나뭇가지가 뻗어나가듯 진화한다는 사실을 밝혀준 데 있다.
위대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과학 이론은 드물지만 자연선택론은 초등학생에게도 통하는 간단한 논리구조로 돼 있다. 그러니 토머스 헉슬리(Thomas H. Huxley, 1825~1895)의 30자 평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이 쉬운 자연선택을 생각해내지 못했다니 이런 바보 같으니!"
『종의 기원』에 대한 다른 독자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초판 1250부가 하루 만에 매진됐다. 하지만 학자들의 평가는 훨씬 더 조심스러웠다. 다윈은 당대 학자들의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3판부터 내용을 대폭 손질하는 등 1859년에서 1872년까지 무려 다섯 차례나 개정판을 냈다.
용어 사용과 관련해서도 흥미로운 변화가 있었다. 오늘날 진화론이라 하면 대개 적자생존부터 떠올리는데 이는 당대 철학자이자 사회진화론의 강력한 옹호자였던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의 영향 때문이다. 다윈 자신도 그 영향으로 5판부터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진화(evolution)'라는 용어 자체도 원래 다윈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줄곧 '변형을 동반한 계통(descent with modification)'이라는 용어를 써오다가 6판에 가서야 '진화'로 대체한다. 동상이몽인가? 스펜서는 적자생존 개념을 인간 사회에 적용하여 '사회 다윈주의'라는 정치 이념을 창안했으며 훗날 인종주의와 우생학의 원흉으로 몰리기도 한다.
영국
박물학자
"인류 역사상 최고의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누굴까? 딱 한 사람만 골라야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그를 택하겠다." 철학자 대니얼 데닛은 그를 감히 뉴턴이나 아인슈타인보다 더 위대한 사상가라고 치켜세운다. 데닛은 다윈이 "자연선택이라는 과정을 도입해 의미와 목적이 없는 물질 영역과 의미, 목적, 그리고 설계가 있는 생명 영역을 통합시켰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에든버러 대학에서의 의학 공부를 채 2년도 못 채우고 낙향한 18세 청년을 그 누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아이디어를 낼 만한 인물이라고 기대했겠는가? 오히려 다윈은 "사냥질, 개, 쥐잡기에나 관심이 있는 너는 가족과 네 자신에게 부끄러운 존재가 될 거다"라는 아버지의 폭언을 눈물로 삼켜야 했다.
1827년 다윈은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꾸역꾸역 신학을 공부하러 간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어떻게 해야 영국을 떠나 생명이 우글대는 열대림을 탐험할 수 있을까?' 인류에게 '적응'이라는 화두를 처음으로 던진 다윈이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주변 환경에 적응하는 데 계속해서 실패해 온 셈이다. 하지만 환경도 언젠가는 변하는 법. 다윈은 우여곡절 끝에 비글 호에 승선하고 꿈에 그리던 남아메리카로 향한다.
만일 다윈이 비글 호를 타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5년 동안(1831~1836) 배멀미와 온갖 풍토병으로 고생할 일은 없었겠지만 '다윈'이라는 이름이 지금처럼 생존, 번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비글 호 탐험을 끝으로 다시는 영국 밖을 나가 보지 못했을 만큼 다윈에게 그것은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다. 길이가 26미터밖에 안 되는 비글 호의 좁은 선실에서 그는 자신의 우상 찰스 라이엘이 쓴 『지질학 원리』를 탐독했고 정박지에서는 열대림과 해안의 온갖 동식물을 관찰·채집했다.
수많은 학문 종의 원류, 다윈의 진화론
『종의 기원』은 인공 교배로 생긴 변이들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한다. 이 논의를 위해 다윈은 비둘기 교배 전문가들과 실제로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다윈은 인공 선택에 의해 새로운 품종이 나올 수 있다면 자연선택에 의해서 새로운 종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자연 변이들은 제한된 환경에서 다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생존 경쟁이 불가피하다. 자연선택은 바로 이 과정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조금이라도 생존에 유리한 형질이 살아남아 자손을 퍼뜨리는 과정이다. 물론 부모 형질이 자식에게 대물림되는 과정도 필요하다. 이 모든 문제를 다룬 후에 특이하게도 다윈은 예상 반론을 정리하고 그것을 조목조목 검토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종의 기원』은 매우 방어적인 책이며 다윈도 고백하듯 '하나의 긴 논증'이다.
생명이 진화한다는 주장 자체는 그 당시만 해도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장 밥티스트 라마르크도 있었고 심지어 다윈의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Erasmus Darwin, 1731~1802)도 비슷한 주장을 했었다. 『종의 기원』의 독창성은 그 진화가 자연선택에 의해서 진행되며 그 결과 생명이 마치 나뭇가지가 뻗어나가듯 진화한다는 사실을 밝혀준 데 있다.
위대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과학 이론은 드물지만 자연선택론은 초등학생에게도 통하는 간단한 논리구조로 돼 있다. 그러니 토머스 헉슬리(Thomas H. Huxley, 1825~1895)의 30자 평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이 쉬운 자연선택을 생각해내지 못했다니 이런 바보 같으니!"
『종의 기원』에 대한 다른 독자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초판 1250부가 하루 만에 매진됐다. 하지만 학자들의 평가는 훨씬 더 조심스러웠다. 다윈은 당대 학자들의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3판부터 내용을 대폭 손질하는 등 1859년에서 1872년까지 무려 다섯 차례나 개정판을 냈다.
용어 사용과 관련해서도 흥미로운 변화가 있었다. 오늘날 진화론이라 하면 대개 적자생존부터 떠올리는데 이는 당대 철학자이자 사회진화론의 강력한 옹호자였던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의 영향 때문이다. 다윈 자신도 그 영향으로 5판부터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진화(evolution)'라는 용어 자체도 원래 다윈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줄곧 '변형을 동반한 계통(descent with modification)'이라는 용어를 써오다가 6판에 가서야 '진화'로 대체한다. 동상이몽인가? 스펜서는 적자생존 개념을 인간 사회에 적용하여 '사회 다윈주의'라는 정치 이념을 창안했으며 훗날 인종주의와 우생학의 원흉으로 몰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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