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미에르 형제[Auguste Lumièr, Leouis Lumière] 영사기
과학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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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8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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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Auguste Lumière
생몰 1862.10.19.~1954.4.10.
출생 프랑스 브장송
국적 프랑스
루이 뤼미에르(동생) 이름 Louis Lumière
생몰 1864.10.5.~1948.6.6.
출생 프랑스 브장송
국적 프랑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다양한 과학기술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등장했다. 오토바이, 자동차, 비행기에서부터 라디오, 엑스선, 원자의 구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발명과 발견이 잇따랐다. 영화도 그중 하나였다. 다른 발명품들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치면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수많은 과학자, 발명가, 사진가, 미술가, 연극 제작자들이 사진을 더욱 크고 활동적으로 보이게 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세계 최초로 영화를 만들어 상영한 공로는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에게 돌아갔다. 오귀스트 뤼미에르(Auguste Lumière, 1862~1954)와 루이 뤼미에르(Louis Lumière, 1864~1948)가 그들이다. 흥미롭게도 뤼미에르는 프랑스 말로 ‘빛’을 의미한다.
뤼미에르 형제의 아버지 앙투안 뤼미에르(Antoine Lumière)는 원래 직업은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였다. 그러다가 사진의 출현으로 일거리가 줄어들자 1861년에 프랑스 중부 지방의 브장송에 이사하면서 사진사로 직업을 바꾸었다. 뤼미에르 부부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렸으며,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라프는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를 넘어섰다. 키네토스코프는 순간적인 영상을 틈이 난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장치였지만, 시네마토그라프는 필름을 연속적으로 영사하여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는 장치였다. 또한 키네토스코프의 경우에는 웬만한 방 하나는 가득 채울 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어서 야외촬영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이에 반해 시네마토그라프는 이동이 가능한 크기를 가지고 있었고 전기가 없어도 수동으로 작동시킬 수 있어서 야외 촬영에도 적합했다. 더 나아가 키네토스코프로는 한 사람씩 영상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반면, 시네마토그라프의 경우에는 많은 대중이 함께 영화를 관람할 수 있었다. 뤼미에르 형제에게 “영화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부여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생몰 1862.10.19.~1954.4.10.
출생 프랑스 브장송
국적 프랑스
루이 뤼미에르(동생) 이름 Louis Lumière
생몰 1864.10.5.~1948.6.6.
출생 프랑스 브장송
국적 프랑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다양한 과학기술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등장했다. 오토바이, 자동차, 비행기에서부터 라디오, 엑스선, 원자의 구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발명과 발견이 잇따랐다. 영화도 그중 하나였다. 다른 발명품들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치면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수많은 과학자, 발명가, 사진가, 미술가, 연극 제작자들이 사진을 더욱 크고 활동적으로 보이게 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세계 최초로 영화를 만들어 상영한 공로는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에게 돌아갔다. 오귀스트 뤼미에르(Auguste Lumière, 1862~1954)와 루이 뤼미에르(Louis Lumière, 1864~1948)가 그들이다. 흥미롭게도 뤼미에르는 프랑스 말로 ‘빛’을 의미한다.
뤼미에르 형제의 아버지 앙투안 뤼미에르(Antoine Lumière)는 원래 직업은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였다. 그러다가 사진의 출현으로 일거리가 줄어들자 1861년에 프랑스 중부 지방의 브장송에 이사하면서 사진사로 직업을 바꾸었다. 뤼미에르 부부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렸으며,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라프는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를 넘어섰다. 키네토스코프는 순간적인 영상을 틈이 난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장치였지만, 시네마토그라프는 필름을 연속적으로 영사하여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는 장치였다. 또한 키네토스코프의 경우에는 웬만한 방 하나는 가득 채울 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어서 야외촬영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이에 반해 시네마토그라프는 이동이 가능한 크기를 가지고 있었고 전기가 없어도 수동으로 작동시킬 수 있어서 야외 촬영에도 적합했다. 더 나아가 키네토스코프로는 한 사람씩 영상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반면, 시네마토그라프의 경우에는 많은 대중이 함께 영화를 관람할 수 있었다. 뤼미에르 형제에게 “영화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부여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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