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러더포드[Ernest Rutherford] 원자 모형
과학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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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3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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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8.30 ~ 1937.10.19
영국
물리학자
"당신이 화장지에 대고 쏜 지름 15인치 대포알이 되돌아와 당신을 때린다고 생각해 보라"
이것이 러더포드가 핵이 포함된 원자 모형을 만들기 전에 관찰한 현상을 설명한 말이다.
뉴질랜드대학 캔터베리 칼리지에서 물리학을 배우고, 졸업논문으로 <고주파전류에 의한 철(鐵)의 자화(磁化)>(1894)를 썼다.
이것은 마르코니에 앞선 전파의 검파방식(자기검파기)에 대한 연구였다.
1895년 케임브리지대학에 유학, 캐번디시연구소에서 J.J.톰슨의 지도하에 연구생활에 들어갔다. 처음 자기검파기를 다루어 공개실험을 하였다.
그후 톰슨과 함께 X선에 의한 기체의 이온화 연구를 시작, 음양(陰陽) 이온의 발생, X선 세기와의 관계, 포화전류 등을 조사하여 기체의 전기전도 현상 해명에 공헌하였다.
이를 계기로 우라늄방사선 연구로 나아가, 이온화작용의 차이에서 방사선의 성분에 2종류가 있음을 발견, α선 ·β선으로 명명하고 그 성질을 조사하였다. 물질 중에서의 투과성 ·이온화작용 ·이온생성의 비율과 속도의 정밀한 측정으로 이 분야의 실험연구를 개척했다.
1898년 몬트리올의 맥길대학 교수가 되고, 토륨의 에머네이션을 발견, 원자의 변환을 예상하여, 1901년부터 F.소디의 협력으로 에머네이션이 방사성 비활성기체라고 결론지었다.
그 방사성의 법칙을 연구해 1902년 방사능이 물질의 원자 내부 현상이며 원소가 자연붕괴하고 있음을 지적, 종래의 물질관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다. 이들은 러더퍼드소디의 이론(1903)으로 알려졌다. 1907년 맨체스터대학으로 옮겨 H.가이거 등과 α선 산란실험을 개시했으며, 가이거와 공동으로계수관을 제작했다. 가이거와 마스든이 실험 중 산란각(散亂角)이 큰 α선을 발견, 이의 해석에서 러더퍼드는 원자 내에 극히 작은 핵, 즉 원자핵의 존재를 결론지어(1911), N.D.보어의 양자론(量子論)의 도입과 더불어 러더퍼드보어의 모형(유핵원자모형)이 나오게 되었다(1913).
제1차 세계대전으로 해군발명연구소에 들어갔으며, 1917년 연구실로 돌아와 질소원자에 α선을 충격시켜 수소를 관측, 처음으로 원자핵의 인공전환에 성공했다(1919). 그 해 케임브리지대학으로 돌아와 캐번디시연구소장이 되었다. 이듬해부터 왕립과학연구소 교수직도 겸하였다. 채드윅과 공동으로 가벼운 원소의 인공전환을 연구, 중성자 ·중수소의 존재를 예상하는 등, 핵물리학 전개에 지도적 역할을 했다.
1908년 노벨화학상을 받고, 1925~1930년 왕립학회 회장을 맡았으며, 과학기술청 자문위원회에도 참여하는 한편, 나치스로부터 망명해온 과학자에 대한 구제위원회 회장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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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8.30 ~ 1937.10.19
영국
물리학자
"당신이 화장지에 대고 쏜 지름 15인치 대포알이 되돌아와 당신을 때린다고 생각해 보라"
이것이 러더포드가 핵이 포함된 원자 모형을 만들기 전에 관찰한 현상을 설명한 말이다.
뉴질랜드대학 캔터베리 칼리지에서 물리학을 배우고, 졸업논문으로 <고주파전류에 의한 철(鐵)의 자화(磁化)>(1894)를 썼다.
이것은 마르코니에 앞선 전파의 검파방식(자기검파기)에 대한 연구였다.
1895년 케임브리지대학에 유학, 캐번디시연구소에서 J.J.톰슨의 지도하에 연구생활에 들어갔다. 처음 자기검파기를 다루어 공개실험을 하였다.
그후 톰슨과 함께 X선에 의한 기체의 이온화 연구를 시작, 음양(陰陽) 이온의 발생, X선 세기와의 관계, 포화전류 등을 조사하여 기체의 전기전도 현상 해명에 공헌하였다.
이를 계기로 우라늄방사선 연구로 나아가, 이온화작용의 차이에서 방사선의 성분에 2종류가 있음을 발견, α선 ·β선으로 명명하고 그 성질을 조사하였다. 물질 중에서의 투과성 ·이온화작용 ·이온생성의 비율과 속도의 정밀한 측정으로 이 분야의 실험연구를 개척했다.
1898년 몬트리올의 맥길대학 교수가 되고, 토륨의 에머네이션을 발견, 원자의 변환을 예상하여, 1901년부터 F.소디의 협력으로 에머네이션이 방사성 비활성기체라고 결론지었다.
그 방사성의 법칙을 연구해 1902년 방사능이 물질의 원자 내부 현상이며 원소가 자연붕괴하고 있음을 지적, 종래의 물질관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다. 이들은 러더퍼드소디의 이론(1903)으로 알려졌다. 1907년 맨체스터대학으로 옮겨 H.가이거 등과 α선 산란실험을 개시했으며, 가이거와 공동으로계수관을 제작했다. 가이거와 마스든이 실험 중 산란각(散亂角)이 큰 α선을 발견, 이의 해석에서 러더퍼드는 원자 내에 극히 작은 핵, 즉 원자핵의 존재를 결론지어(1911), N.D.보어의 양자론(量子論)의 도입과 더불어 러더퍼드보어의 모형(유핵원자모형)이 나오게 되었다(1913).
제1차 세계대전으로 해군발명연구소에 들어갔으며, 1917년 연구실로 돌아와 질소원자에 α선을 충격시켜 수소를 관측, 처음으로 원자핵의 인공전환에 성공했다(1919). 그 해 케임브리지대학으로 돌아와 캐번디시연구소장이 되었다. 이듬해부터 왕립과학연구소 교수직도 겸하였다. 채드윅과 공동으로 가벼운 원소의 인공전환을 연구, 중성자 ·중수소의 존재를 예상하는 등, 핵물리학 전개에 지도적 역할을 했다.
1908년 노벨화학상을 받고, 1925~1930년 왕립학회 회장을 맡았으며, 과학기술청 자문위원회에도 참여하는 한편, 나치스로부터 망명해온 과학자에 대한 구제위원회 회장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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