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리 캐번디시[Henry Cavendish] 수소와 물
과학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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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7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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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1.10.10.~1810.2.24.
출생 프랑스 니스 국적 영국
화학자, 물리학자
캐번디시는 1731년에 프랑스의 관광지로 유명한 니스에서 태어났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어머니가 니스에서 요양을 하던 중에 첫째 아들인 캐번디시를 낳았던 것이다. 그의 집안은 어머니가 먼 지역까지 요양을 갈 정도로 부유했다. 그의 집안은 데번셔 공작(Duke of Devonshire)의 직계로서 아버지는 데번셔 2세의 다섯 번째 아들이었다.
1760년부터 왕립 학회의 회원이었지만, 목요일마다 학회의 회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 외에는 학회와 그다지 접촉하지는 않았다.
기록상의 캐번디시의 첫 번째 연구는 비소에 관한 것이었으며, 1764년경에 이루어졌다
캐번디시의 초기 연구는 열에 관한 것이었다.
1765년에 그는 수은의 비열(比熱), 물과 얼음의 잠열, 산과 알칼리의 중화열에 대해서 정밀하게 측정했다. 또한 열을 물체 입자의 운동이라고 규정했고 열에너지와 운동에너지의 상호변환에 관한 연구도 수행했다.
1766년 발표한 논문에서 처음으로 수소를 독립된 원소로 보았으며, 이를 '가연성 공기'라고 불렀다. 또한 이산화 탄소에 대해서도 연구하였다
캐번디시는 그의 생애의 황금기를 기체에 대한 연구로 보냈다. 당시에 블랙(Black, Joseph 1728 4/16~1799 11/26. 영국의 화학자) 은 석회석을 가열해서 탄산가스를 만들어 냈는데, 캐번디시는 석회석을 가열하지 않고 탄산가스를 발생시킬 수 있는 방법에 주목했다. 석회석에 염산을 조금씩 첨가하자 부글부글 끓더니 거품이 일어나며 가스가 나왔다. 그 가스를 시험관에 잡아넣은 후 촛불을 켜서 시험관 속에 놓았더니 촛불은 곧 꺼져 버렸다. 이러한 실험을 통해 그는 탄산가스를 발생시키는 새로운 방법을 알아낼 수 있었다. 캐번디시는 또한 황산을 석회석에 부어 보았다. 이번에도 염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황산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거품을 내며 가스가 발생했다. 같은 방법으로 실험을 해 본 결과 그 가스도 탄산가스임을 알 수 있었다. 이로써 그는 석회석에 산을 주입하면 화학작용이 일어나 탄산가스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캐번디시의 다음 연구 주제는 수소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어떤 과학자가 철에다 황산을 부었더니 이상한 기체가 발생했고, 그 기체에 불을 붙였더니 “펑”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났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또한 그는 다른 과학자가 탄광의 광부들이 ‘불타는 증기’라고 부르는 기체를 모아 불을 붙여 보았더니 파란 불꽃을 내며 타들어 갔다는 기록도 접했다.
캐번디시는 불타는 증기로 불린 기체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철이나 아연과 같은 금속에 염산이나 황산과 같은 산을 첨가하는 실험을 계속했다.
1766년에 그는 유리병에 아연과 묽은 황산을 넣고 발생하는 기체의 거품을 막기 위해 유리관을 꼽은 후 그 위에 실린더를 설치했다. 그 실린더의 끝에는 탄산칼륨을 넣어 발생되는 기체 중의 습기를 흡수하게 했다. 이러한 실험을 통해 그는 가장 가벼우면서 불에 잘 타는 성질을 가진 ‘가연성 공기(inflammable air)’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오늘날의 수소에 해당한다.
캐번디시의 또 다른 관심사는 오늘날의 전기 이론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1797~1798년에 캐번디시는 또 하나의 실험에 도전했다. 그것은 지구의 밀도를 측정하기 위한 정밀한 실험으로 ‘캐번디시 실험’으로 불린다
캐번디시는 1810년에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의 병을 간호하던 심부름꾼 아이를 밖으로 보낸 채 고독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남긴 재산은 무려 100만 파운드나 되었다. 오늘날 우리 돈의 가치로 따지면 약 2조원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당시 프랑스의 과학자 비오(Jean-Baptiste Biot)는 캐번디시를 “학식 있는 사람 중에 가장 부자인 동시에 부자 중에서 가장 학식 있는 사람”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출생 프랑스 니스 국적 영국
화학자, 물리학자
캐번디시는 1731년에 프랑스의 관광지로 유명한 니스에서 태어났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어머니가 니스에서 요양을 하던 중에 첫째 아들인 캐번디시를 낳았던 것이다. 그의 집안은 어머니가 먼 지역까지 요양을 갈 정도로 부유했다. 그의 집안은 데번셔 공작(Duke of Devonshire)의 직계로서 아버지는 데번셔 2세의 다섯 번째 아들이었다.
1760년부터 왕립 학회의 회원이었지만, 목요일마다 학회의 회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 외에는 학회와 그다지 접촉하지는 않았다.
기록상의 캐번디시의 첫 번째 연구는 비소에 관한 것이었으며, 1764년경에 이루어졌다
캐번디시의 초기 연구는 열에 관한 것이었다.
1765년에 그는 수은의 비열(比熱), 물과 얼음의 잠열, 산과 알칼리의 중화열에 대해서 정밀하게 측정했다. 또한 열을 물체 입자의 운동이라고 규정했고 열에너지와 운동에너지의 상호변환에 관한 연구도 수행했다.
1766년 발표한 논문에서 처음으로 수소를 독립된 원소로 보았으며, 이를 '가연성 공기'라고 불렀다. 또한 이산화 탄소에 대해서도 연구하였다
캐번디시는 그의 생애의 황금기를 기체에 대한 연구로 보냈다. 당시에 블랙(Black, Joseph 1728 4/16~1799 11/26. 영국의 화학자) 은 석회석을 가열해서 탄산가스를 만들어 냈는데, 캐번디시는 석회석을 가열하지 않고 탄산가스를 발생시킬 수 있는 방법에 주목했다. 석회석에 염산을 조금씩 첨가하자 부글부글 끓더니 거품이 일어나며 가스가 나왔다. 그 가스를 시험관에 잡아넣은 후 촛불을 켜서 시험관 속에 놓았더니 촛불은 곧 꺼져 버렸다. 이러한 실험을 통해 그는 탄산가스를 발생시키는 새로운 방법을 알아낼 수 있었다. 캐번디시는 또한 황산을 석회석에 부어 보았다. 이번에도 염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황산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거품을 내며 가스가 발생했다. 같은 방법으로 실험을 해 본 결과 그 가스도 탄산가스임을 알 수 있었다. 이로써 그는 석회석에 산을 주입하면 화학작용이 일어나 탄산가스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캐번디시의 다음 연구 주제는 수소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어떤 과학자가 철에다 황산을 부었더니 이상한 기체가 발생했고, 그 기체에 불을 붙였더니 “펑”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났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또한 그는 다른 과학자가 탄광의 광부들이 ‘불타는 증기’라고 부르는 기체를 모아 불을 붙여 보았더니 파란 불꽃을 내며 타들어 갔다는 기록도 접했다.
캐번디시는 불타는 증기로 불린 기체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철이나 아연과 같은 금속에 염산이나 황산과 같은 산을 첨가하는 실험을 계속했다.
1766년에 그는 유리병에 아연과 묽은 황산을 넣고 발생하는 기체의 거품을 막기 위해 유리관을 꼽은 후 그 위에 실린더를 설치했다. 그 실린더의 끝에는 탄산칼륨을 넣어 발생되는 기체 중의 습기를 흡수하게 했다. 이러한 실험을 통해 그는 가장 가벼우면서 불에 잘 타는 성질을 가진 ‘가연성 공기(inflammable air)’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오늘날의 수소에 해당한다.
캐번디시의 또 다른 관심사는 오늘날의 전기 이론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1797~1798년에 캐번디시는 또 하나의 실험에 도전했다. 그것은 지구의 밀도를 측정하기 위한 정밀한 실험으로 ‘캐번디시 실험’으로 불린다
캐번디시는 1810년에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의 병을 간호하던 심부름꾼 아이를 밖으로 보낸 채 고독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남긴 재산은 무려 100만 파운드나 되었다. 오늘날 우리 돈의 가치로 따지면 약 2조원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당시 프랑스의 과학자 비오(Jean-Baptiste Biot)는 캐번디시를 “학식 있는 사람 중에 가장 부자인 동시에 부자 중에서 가장 학식 있는 사람”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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