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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상식나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1,695 2017.08.22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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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384년 ~ BC 322년
그리스 북쪽 트라키아의 스타게이로스
철학자

아버지 니코마코스(Nikomachos)는 마케도니아의 왕이었던 아민타스 3세(Amyntas III)의 친구이자 주치의였고, 그의 어머니 파에스티스(Phaestis)는 부유한 가문의 후손이었다. 그리스 정치철학 고전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금까지 누구도 하지 못한 체계적이고 방대한 주제에 대한 연구를 우리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실천 철학’과 ‘덕 윤리’라는 지배적 연구 경향에 가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은 아직도 학문적 발굴 중에 있다. 그러기에 정치적 감성과 다수의 정치에 대한 철학적 성찰, 정치적 개연성 속에서 빚어낸 제도적 구상, 그리고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정치사회적 조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만의 해법이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방인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아테네인들의 시선은 그리 따뜻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아테네인들은 자기들과는 다른 옷차림과 요란한 치장에 눈살을 찌푸렸고, 마케도니아와 아테네의 긴장이 고조될 때마다 그에 대한 대중의 존경심도 순식간에 적대감으로 바뀌었다. 기원전 347년 플라톤이 죽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를 떠나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 북동쪽에 있는
오린토스(Olinthos)가 마케도니아의 수중에 떨어지자 아테네에 반(反)마케도니아 정서가 팽배했기 때문이었다. 기원전 335년 아테네로 돌아와 뤼케이온(Lykeion)에 학교를 세웠지만, 기원전 322년 그가 아테네를 영원히 떠나야했던 이유도 알렉산더 대왕 사후에 불어 닥친 아테네인들의 마케도니아에 대한 적개심 때문이었다. 그가 세운 학교는 아테네에 남았지만, 그는 아테네인들에게는 영원한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아끼던 제자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의 정치철학은 여러 가지 점에서 플라톤의 것과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그의 정치철학을 플라톤의 것과 구별해서 ‘실천 철학’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추구하던 ‘철학적 지혜’(sophia)와 다른 개별적이고 특수한 경우에 적용될 ‘실천적 지혜’(phronēsis)가 있다는 전제에서 정치를 다루기 때문이다.4) 그러나 그가 ‘철학적 지혜’를 배제한 것도 아니고, ‘모든 인간에게 가장 좋은 삶’을 다루는 ‘윤리학’도 엄밀하게 말하자면 ‘정치’(politikē)에 포함된 것이기에, 이론과 실천의 이분법적 틀로 그와 플라톤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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