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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상식나라

아이작 뉴턴[Sir Isaac Newton ]

33,689 2017.10.13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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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2.12.25.~1727.3.20.
영국
물리학자.천문학자.수학자

뉴턴은 갈릴레오가 사망하던 1642년 12월 25일(당시 사용되던 율리우스력에 의하면)에 링컨셔 지역의 울즈소프(Woolsthorpe)라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농부였던 뉴턴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3개월 전에 사망했으며, 조산아였던 뉴턴은 몸집이 매우 작았다. 3년 뒤에 어머니가 성직자와 재혼하면서 뉴턴은 농장의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뉴턴의 어머니는 아들이 농부가 되기를 원했다. 어머니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아들을 농장으로 불러 허드렛일을 시킬 정도로 교육에 무관심했다.
뉴턴은 다른 아이들과 떨어져 혼자 지내면서 내면세계에 깊이 침잠해 들어갔고, 자연스럽게 호기심을 키워나가는 시간들을 많이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자기 자신과 대화하기를 좋아했는데, 이는 평생에 걸친 뉴턴의 성격이 되어 버렸다.

12살부터  진기한 풍차에 흥미를 느끼고 그 작동 원리를 연구했다
19살이 되던 1661년에 뉴턴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21살인 1663년 당시 최초의 루카스 수학 석좌교수로 막 부임한 배로(Isaac Barrow)의 기하학과 광학 강의를 들었으며, 독학으로 갈릴레오의 역학, 케플러의 광학과 천문학, 보일의 색깔론, 데카르트의 기계적 철학, 광학과 기하학에 대한 저술을 공부했다. 뉴턴은 자연현상을 물질과 운동으로 설명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판했던 데카르트의 기계적 철학에 매료되었다

뉴턴이 처음으로 망원경에 관심을 가질 무렵인 1664년에, 그는 프리즘을 구입해서 빛의 굴절을 관찰하기 시작했고 이는 40년 후인 1704년에 뉴턴의 『광학』(Opticks)이 탄생할 수 있었던 초석이 되었다. 특히 뉴턴은 1665~1666년의 기간 동안에 집에 머물면서 암실을 만들어서 방을 어둡게 한 뒤에 창에 만든 둥근 구멍을 통해 한 줄기의 태양 광선이 들어오게 한 후 그것을 프리즘으로 굴절시켜서 길쭉한 무지개(스펙트럼)가 만들어지는 것을 관찰했다. 뉴턴의 호기심은 동그란 모양의 광선이 프리즘을 통과한 뒤에 길쭉하게 변하고, 다른 색깔로 염색한 실이 프리즘을 통해서 보면 분리된 것처럼 보인다는 현상에 의해서 자극을 받았다. 그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깊이 생각했고, 결국 빛과 색깔에 대한 기존의 이론들이 이런 현상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뉴턴은 이런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을 찾으려고 했으며, 오래지 않아서 “백색광에는 원래 굴절률이 다른 여러 색깔의 광선이 존재하며 이것들이 프리즘을 통과한 후 서로 다른 각도로 굴절되기 때문에 길쭉한 스펙트럼을 만든다”라고 결론 내렸다.

뉴턴은 자신의 이론에 근거해서 반사 망원경을 직접 제작했고, 이로 인해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과학계에 널리 알릴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최고의 물리학자로 꼽히던 호이겐스는 뉴턴이 빛의 입자 이론을 주장한다고 생각했고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뉴턴을 비판했다.
1675년 뉴턴은 빛에 대한 두 번째 논문을 왕립학회에 보냈는데, 이 논문을 놓고 다시 왕립학회의 큐레이터(curator)였던 로버트 후크와 부딪쳤다.
이러한 논쟁들에 힘들어했던 뉴턴은 광학과 관련된 논문이나 저술을 출판하지 않고 있다가,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인 1704년이 되어서야 자신의 책 『광학』(Opticks)을 출판했다

만유인력은(사과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1666년 과수원의 사과나무 아래서 졸고 있던 뉴턴의 머리 위로 사과가 떨어졌다. 잠에서 깬 뉴턴은 사과가 왜 아래로 똑바로 떨어지는 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사과가 아래로 떨어지는 데에는 어떤 힘, 즉 중력이 작용하며 그 힘은 행성을 포함해 우주의 모든 만물에 적용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일화는 정말로 사실일까?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말년에 뉴턴 자신은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적어도 네 번은 주장했다.)  모든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인력 개념을 도입하고 그것의 수학적 크기와 특성을 제시함으로써, 천상계의 물리학과 지상계의 물리학을 단일한 기반에서 설명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했다. 뉴턴의 만유인력 개념은 크게 세 단계를 거쳐서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발전된 개념이다.
첫 번째 단계는 흔히 ‘기적의 해’라고 불리는 1665~1666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이 단계에서 태양과 행성에 작용하는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수학적인 개념이 등장했다.
두 번째는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679~1680년으로, 뉴턴이 후크가 보낸 편지에 자극을 받아서 힘의 방향, 즉 구심력의 개념을 형성하는 단계다.
세 번째 단계는 1684~1687년까지로, 천문학자 핼리의 청으로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이 작용할 때 행성의 운동궤적이 타원이 된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 계기가 되어 『프린키피아』를 쓰면서 만유인력 개념을 완성한 단계다.

1687년 뉴턴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책을 발표했다. 자신의 연구 성과를 발표하는 일에 인색했던 그가 이 책을 쓰게 된 데는 에드먼드 핼리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뉴턴이 책을 쓰도록 설득했으며 중도에 포기하지 않도록 격려했다. 1686년 4월 28일 책의 1권에 해당하는 내용을 왕립 학회에 발표하게 한 것도 그였다. 그리고 총 세 권의 책을 발행하는데 들어간 인쇄 비용까지도 자신이 부담했다. 이 기념비적인 책은 뉴턴의 세 가지 법칙 즉 ‘관성의 법칙’, ‘운동의 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과 만유인력, 천체의 운동에 관한 내용 등이 담겨 있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걸작으로 칭송 받았다. 그리고 철학자 존 로크 같은 이는 뉴턴을 신처럼 여기기까지 했다.

1688년의 명예혁명 이후에 케임브리지 대학 대표로 하원에 진출해서 정계에 입문했으며, 위조 동전을 방지하는 기술을 발명해서 1691년에 조폐국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1703년에는 왕립학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으로 왕립학회를 통치했다. 1705년에는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knight)에 서훈되었는데, 이는 과학적 업적 때문에 과학자가 작위를 받은 첫 번째 사례였다. 뉴턴은 독신으로 살다가  1727년 3월 20일에(85세) 사망했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영국의 시인 알렉산더 포프는 뉴턴의 조사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어둠 속에 숨겨져 있었네.
신이 말하길, 뉴턴이여 있으라.
그러자 모든 것이 광명이었나니.


 “나는 세상에 내가 어떻게 비치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 자신이 바닷가에서 노는 소년이라고 생각했다.
내 앞에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은 진리라는 거대한 대양이 펼쳐져 있고, 가끔씩 보통 것보다 더 매끈한 돌이나 더 예쁜 조개 껍질을 찾고
즐거워하는 소년 말이다.”                "Sir Isaac New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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