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드 페르마[Pierre de Fermat] 17세기 최고의 수학자
과학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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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5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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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8.17 ~ 1665.1.12
프랑스
수학 자
프랑스의 수학자. 17세기 최고의 수학자로 손꼽힌다.
근대의 정수 이론 및 확률론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고, 좌표기하학을 확립하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1601년에 툴루즈 근처 보몽드로마뉴(Beaumont-de-Lomagne)에서 부유한 피혁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는 법학을 공부하여 변호사가 되었고, 30세에는 툴루즈의 청원위원(請願委員)이 되었으며,
1648년부터는 툴루즈 지방의회의 칙선의원(勅選議員)이 되어 생애를 마칠 때까지 그 직에 종사하였다.
수학을 취미로 하는 아마추어 수학자였으나 여러 방면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으므로, 17세기 최고의 수학자로 손꼽힌다.
근대의 정수 이론 및 확률론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고, 좌표기하학을 확립하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으며
나중에 아이삭 뉴턴(Isaac Newton)이 미적분학에 응용하였던 극대값과 극소값을 결정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창안하였다.
연구 성과 가운데 우선 미적분(微積分)에 관한 업적을 들 수 있다. 연속곡선(連續曲線)에 접선(接線)을 긋는 방법으로서 제기된
이 문제를 페르마는 ‘극값[極値]의 문제’로 유도하여 미분의 개념에 도달시킨 것이며, 미적분학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뉴턴이나 라이프니츠가 태어나기 10여 년 전에 이런 성과가 얻어진 점은 주목할 만하다
프랑스
수학 자
프랑스의 수학자. 17세기 최고의 수학자로 손꼽힌다.
근대의 정수 이론 및 확률론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고, 좌표기하학을 확립하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1601년에 툴루즈 근처 보몽드로마뉴(Beaumont-de-Lomagne)에서 부유한 피혁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는 법학을 공부하여 변호사가 되었고, 30세에는 툴루즈의 청원위원(請願委員)이 되었으며,
1648년부터는 툴루즈 지방의회의 칙선의원(勅選議員)이 되어 생애를 마칠 때까지 그 직에 종사하였다.
수학을 취미로 하는 아마추어 수학자였으나 여러 방면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으므로, 17세기 최고의 수학자로 손꼽힌다.
근대의 정수 이론 및 확률론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고, 좌표기하학을 확립하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으며
나중에 아이삭 뉴턴(Isaac Newton)이 미적분학에 응용하였던 극대값과 극소값을 결정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창안하였다.
연구 성과 가운데 우선 미적분(微積分)에 관한 업적을 들 수 있다. 연속곡선(連續曲線)에 접선(接線)을 긋는 방법으로서 제기된
이 문제를 페르마는 ‘극값[極値]의 문제’로 유도하여 미분의 개념에 도달시킨 것이며, 미적분학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뉴턴이나 라이프니츠가 태어나기 10여 년 전에 이런 성과가 얻어진 점은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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