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실[蔣英實]
과학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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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7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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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대 과학자로 널리 알려진 장영실(1390년경~?)은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인 자격루를 우리나라 최초로 만든 인물이다.
당시 사람들은 장영실을 가리켜 “과학을 위해 태어난 인물”이라 칭송하였다.
장영실의 재주가 조정에 알려져 태종이 그를 발탁하였다. 세종 즉위 후 장영실은 명나라에 유학 가서, 천문관측시설 관련 자료를 수집해 이듬해인 1422년에 왔고, 이를 바탕으로 자격루 등을 만들었다. 수집해 온 책 중에는 중국의 역대 「천문지」와 1206년에 아랍의 알 자자리가 쓴 「정교한 기계장치의 지식서」가 있었다.
“1421년 세종이 남양 부사 윤사웅, 부평 부사 최천구, 동래 관노 장영실을 불러서 혼천의 제도를 토론하여 연구하게 하니
세종의 뜻에 합하지 않음이 없었다. ”
세종은 장영실이 천문에 관한 수많은 자료를 가지고 돌아오자 「양각혼의성상도감(兩閣渾儀成象都監)」이라는 천문관청을 만들어 왕립천문대 건설에 돌입했다.
장영실은 중국에서 가져온 자료를 바탕으로 처음에는 ‘경점기’라는 물시계를 만들고 이를 더 발전시켜 자동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었다.
동래현의 관노비에서 궁궐의 궁노비로 이동한 장영실. 이후 상의원 별좌, 정4품의 호군, 종3품의 대호군까지 오르면서 세종의 뜻을 받들어 많은 천문기구를 제작하였다.
장영실의 감독하에 만들어진 세종의 가마가 부서져, 장영실은 불경죄로 관직에서 파면되었고, 그 뒤 장영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없다.
장영실이 세운 업적은 조선 최초의 천문관측대인 간의대를 비롯하여, 대간의, 소간의, 규표, 앙부일구, 일성정시의, 천평일구, 정남일구, 현주일구, 갑인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장영실의 아버지, 장성휘
장영실의 아버지는 중국에서 온 귀화인. 아버지 집안은 노비 출신이 아니나, 어머니 신분을 따라서 장영실은 동래현의 관노로 태어났다
장영실이 태종과 세종대에 살았던 인물인 것은 틀림없지만, 정확한 생몰 연대는 알려지지 않는다. 그의 과학적 업적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여러 번 등장할 정도로 유명하지만, 정작 장영실의 출생과 말년 활동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어 일생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 까닭은 그의 출생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종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장영실의 출생에 관한 자료는 「세종실록」에 전하는 딱 한 줄의 기사가 전부이다.
아산 장씨 족보에는 「세종실록」과 다르게 아버지 장성휘가 조선에 귀화한 중국인이 아니라, 고려 때 송나라에서 망명한 이후 줄곧 한반도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귀화인의 후손이라고 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장영실의 집안은 양반 가문이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관료를 배출한 것이다.
어머니 신분을 따라서 노비가 되다.
아버지 장성휘가 노비 출신이 아닌데, 장영실이 관노의 신분으로까지 추락한 것이 잘 설명되지는 않는다.
다만 어머니가 동래현의 기녀였다는 것이 단서이다.
그러면 왜 장영실이 노비가 되었을까? 이는 기녀인 어머니의 신분 탓이 크다. 조선시대 관기들은 신분상 천민에 해당한다.
관기 혹은 관비 소생의 자식들은 비록 아버지가 높은 신분이라 해도 대를 이어 관노비가 되었다.
관노비는 관아의 온갖 일을 도맡아 하며, 아전들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노비가 된 것은 부친 장성휘가 조선왕조에 들어와 역적으로 몰려 죽고 아들인 장영실이 어머니와 함께 관노가 되었다는 추정도 있을 수 있다.
어떤 것이 사실에 가까운지 현재로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점은 장영실은 오늘날로 치면 다문화 가정 출신이거나 혹은 후손이었고, 과학적 재능이 비상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인 자격루를 우리나라 최초로 만든 인물이다.
당시 사람들은 장영실을 가리켜 “과학을 위해 태어난 인물”이라 칭송하였다.
장영실의 재주가 조정에 알려져 태종이 그를 발탁하였다. 세종 즉위 후 장영실은 명나라에 유학 가서, 천문관측시설 관련 자료를 수집해 이듬해인 1422년에 왔고, 이를 바탕으로 자격루 등을 만들었다. 수집해 온 책 중에는 중국의 역대 「천문지」와 1206년에 아랍의 알 자자리가 쓴 「정교한 기계장치의 지식서」가 있었다.
“1421년 세종이 남양 부사 윤사웅, 부평 부사 최천구, 동래 관노 장영실을 불러서 혼천의 제도를 토론하여 연구하게 하니
세종의 뜻에 합하지 않음이 없었다. ”
세종은 장영실이 천문에 관한 수많은 자료를 가지고 돌아오자 「양각혼의성상도감(兩閣渾儀成象都監)」이라는 천문관청을 만들어 왕립천문대 건설에 돌입했다.
장영실은 중국에서 가져온 자료를 바탕으로 처음에는 ‘경점기’라는 물시계를 만들고 이를 더 발전시켜 자동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었다.
동래현의 관노비에서 궁궐의 궁노비로 이동한 장영실. 이후 상의원 별좌, 정4품의 호군, 종3품의 대호군까지 오르면서 세종의 뜻을 받들어 많은 천문기구를 제작하였다.
장영실의 감독하에 만들어진 세종의 가마가 부서져, 장영실은 불경죄로 관직에서 파면되었고, 그 뒤 장영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없다.
장영실이 세운 업적은 조선 최초의 천문관측대인 간의대를 비롯하여, 대간의, 소간의, 규표, 앙부일구, 일성정시의, 천평일구, 정남일구, 현주일구, 갑인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장영실의 아버지, 장성휘
장영실의 아버지는 중국에서 온 귀화인. 아버지 집안은 노비 출신이 아니나, 어머니 신분을 따라서 장영실은 동래현의 관노로 태어났다
장영실이 태종과 세종대에 살았던 인물인 것은 틀림없지만, 정확한 생몰 연대는 알려지지 않는다. 그의 과학적 업적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여러 번 등장할 정도로 유명하지만, 정작 장영실의 출생과 말년 활동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어 일생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 까닭은 그의 출생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종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장영실의 출생에 관한 자료는 「세종실록」에 전하는 딱 한 줄의 기사가 전부이다.
아산 장씨 족보에는 「세종실록」과 다르게 아버지 장성휘가 조선에 귀화한 중국인이 아니라, 고려 때 송나라에서 망명한 이후 줄곧 한반도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귀화인의 후손이라고 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장영실의 집안은 양반 가문이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관료를 배출한 것이다.
어머니 신분을 따라서 노비가 되다.
아버지 장성휘가 노비 출신이 아닌데, 장영실이 관노의 신분으로까지 추락한 것이 잘 설명되지는 않는다.
다만 어머니가 동래현의 기녀였다는 것이 단서이다.
그러면 왜 장영실이 노비가 되었을까? 이는 기녀인 어머니의 신분 탓이 크다. 조선시대 관기들은 신분상 천민에 해당한다.
관기 혹은 관비 소생의 자식들은 비록 아버지가 높은 신분이라 해도 대를 이어 관노비가 되었다.
관노비는 관아의 온갖 일을 도맡아 하며, 아전들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노비가 된 것은 부친 장성휘가 조선왕조에 들어와 역적으로 몰려 죽고 아들인 장영실이 어머니와 함께 관노가 되었다는 추정도 있을 수 있다.
어떤 것이 사실에 가까운지 현재로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점은 장영실은 오늘날로 치면 다문화 가정 출신이거나 혹은 후손이었고, 과학적 재능이 비상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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